이 기사는 04월 23일 17:31 자본 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마켓인사이트 4월23일 오후 4시10분

2015년 초 프리미엄 신선식품 직배송 서비스를 내건 마켓컬리(사명 더파머스)가 초기 자금 50억원을 투자받았다는 소식에 벤처업계 관계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아이디어 단계에 투자하는 엔젤투자는 통상 투자금이 1억원 안팎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성공 가능성이 보일 때 나올 법한 투자 액수를 설립 2개월 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유치했다.

당시 더파머스에 거금을 베팅한 투자자는 ‘은둔의 투자 고수’ 장덕수 회장이 이끄는 DS자산운용과 코스닥 상장 벤처캐피털(VC)인 DSC인베스트먼트였다. 이들이 이례적으로 초기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건 전자상거래 시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한 이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대규모 자금이 소요된다고 판단했다. 신선식품 직배송을 위해선 택배회사에 버금가는 물류시스템을 갖춰야 하고, 공격적인 광고·마케팅도 필수적이어서다. 김슬아 더파머스 대표는 “VC들의 과감한 투자가 없었다면 자금 부족으로 계획을 수정했을 것이고 마켓컬리는 기존 서비스의 아류작에 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켓인사이트] 2개월 스타트업에 50억 베팅한 VC… 마켓컬리 '식품배송 혁신' 밑거름
국내 최초 ‘샛별배송 서비스’ 도입

더파머스는 2015년 1월 김 대표가 박길남 전략이사와 함께 창업했다. 이 회사가 운영하는 마켓컬리는 신선 식자재를 당일에 배송해주는 모바일 앱(응용프로그램)이다.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 고급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식재료 등 기존 소셜커머스 업체는 다루지 않는 고급 식재료를 배송하는 전략으로 주부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오후 11시 전에 주문하면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집 앞에 배송해주는 ‘샛별배송 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도입해 성장에 날개를 달았다.

미국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싱가포르 국영 투자회사 테마섹 출신인 김 대표는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서 박 이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평소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김 대표는 서울 마장동의 유명한 소고기 전문점 ‘본앤브레드’에서 한우를 직접 주문하고, 채소 농장을 찾아다니는 등 좋은 먹거리를 찾는 취미가 있었다. 유통·물류 분야 컨설팅 경험이 있었던 박 이사는 김 대표와 함께 사내 맛집 동호회 멤버였다. 1차 소고기, 2차 돼지고기, 3차 양곱창을 먹는 육식 모임이었다. 김 대표는 “우리끼리 공동구매해 먹던 본앤브레드 소고기를 소셜커머스로 확장해 보자는 아이디어에 박 이사가 맞장구를 친 게 창업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어라”

첫 투자금 50억원은 순식간에 소진됐다. 샛별배송에 많은 돈이 들어가서다. 성장 속도만큼 자금 압박도 커졌다. 2015년 말 두 번째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VC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쿠팡 위메프 티켓몬스터 등 조(兆) 단위 투자를 받은 이른바 소셜커머스 3사의 누적 적자가 쌓이면서 업계에 ‘거품론’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이때 VC업계의 맏형격인 DS자산운용이 나섰다. 더파머스 창업인력의 실력과 열정을 믿고 자발적으로 이 회사를 다른 VC들에게 홍보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VC들에게 매달 성과지표 달성 상황을 이메일로 보고했다. 차질 없이 성장하고 있고 경영진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

2016년 7월 투자하겠다는 곳이 나왔다. 미국 VC인 트랜스링크와 과학기술인공제회가 함께 설립한 세마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였다. 이 VC는 “물류시스템 개선에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며 다른 VC들도 끌어들였다. 같은 해 11월 세마트랜스링크, UTC인베스트먼트, DS자산운용, LB인베스트먼트, 한국투자파트너스, 캡스톤파트너스 등 6곳의 VC들이 170억원을 투자했다. 당시 기업 가치는 400억원으로 평가받았다.

김태규 DS자산운용 수석운용역은 “먹거리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마켓컬리가 고객 신뢰를 얻고 있다는 점에 투자자들이 주목했다”며 “투자만 뒷받침되면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준 VC들

VC들의 투자는 단순 자금 지원에 그치지 않았다. 마켓컬리는 자체 구축한 냉장차량 및 저장고를 활용해 지난해 12월 제3자 물류 사업에도 나섰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모회사가 있는 세마트랜스링크가 제안한 사업이다. 아마존 등 미국 전자상거래 업체들도 ‘배송 대여 사업’을 한다는 데 착안했다.

DS자산운용은 자신들이 투자한 ‘맛집 편집숍’ 스타트업 오버더디쉬(OTD)와 마켓컬리의 협업을 제안했다. 두 회사는 서울 성수동에 한국판 첼시마켓인 ‘성수연방’을 오는 7월 열 계획이다. 성수동 화학공장을 개조해 식품 제조와 포장, 소비와 배송을 한곳에서 해결하는 ‘복합 식음료 문화공간’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 같은 VC들의 지원에 힘입어 마켓컬리는 급성장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기준 회원 수는 60만 명으로 늘었고 월 매출은 100억원을 넘어섰다. 2015년 5월 서비스를 내놓은 지 3년이 채 되지 않는 가운데 이뤄낸 성과다. 올해 매출은 1600억원을 넘길 것으로 회사 측은 추정하고 있다.

더파머스는 오는 5월 말 완료를 목표로 상장 전 투자유치(프리IPO)를 진행하고 있다. 500억원 이상의 자금을 유치해 물류 시스템을 확충하고 마케팅도 더욱 공격적으로 한다는 계획이다. SK네트웍스 지엔텍벤처투자 등이 이미 투자를 확정했다. VC업계는 이번 투자로 더파머스의 기업 가치가 2000억원을 넘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